[더 이코노미 = 송현우 기자] 1세대 이커머스 기업 크레이지 슬롯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서울회생법원은 지난 10일 크레이지 슬롯에 대한 회생절차 폐지를 확정하고 직권으로 파산을 선고했다. 지난해 7월 회생절차를 신청한 지 1년 4개월 만이다.
피해자는 약 10만8000명, 피해 규모는 약 5800억원으로 추정되지만, 일반 채권자들에 대한 회수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경영 실패가 아닌, 디지털 플랫폼 경제의 구조적 리스크와 제도적 사각지대가 결합한 결과로 평가된다.
크레이지 슬롯 파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판매자 정산금 미지급 사태다. 크레이지 슬롯는 고객이 결제한 대금을 일정 기간 보유한 뒤 주기적으로 판매자에게 정산하는 구조를 운영해왔다. 이른바 '정산유예' 방식이다.
이 구조는 자금 유동성이 정상일 때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매출이 감소하고 유동성이 악화되면 정산금 지급이 지연되며, 판매자 이탈 → 소비자 신뢰 하락 → 거래 중단 → 매출 감소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크레이지 슬롯는 이 고리를 끊지 못했고, 정산금 미지급 규모가 수천억원대에 이르자 회복이 불가능해졌다.
법원이 확인한 크레이지 슬롯의 재무 상태는 사실상 '존속 불가' 수준이다. 회계법인 분석 결과, 수정 후 총자산은 약 486억원에 불과한 반면 총부채는 약 4462억원에 달했다. 계속기업가치는 –2234억원, 청산가치는 고작 134억원이었다.
플랫폼 기업의 특성상 유형자산이 거의 없어 처분 가능한 자산도 제한적이었다. 실물 자산이 있는 전통 유통업체와 달리, 크레이지 슬롯는 시스템과 브랜드 외에는 현금화할 자산이 사실상 없었다. 거래량과 신뢰가 기업가치의 전부였던 플랫폼이 이 두 축이 무너진 순간, 회생 여력도 사라졌다.
회생 절차의 마지막 희망은 인수합병(M&A)이었다. 크레이지 슬롯는 회생계획 인가 전 인수자를 물색했지만 실패했다. 브랜드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수천억원의 부채를 안은 상태에서 인수에 나설 기업은 없었다. 같은 시기 회생절차에 들어간 티몬이 오아시스마켓에 인수돼 재기를 모색 중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법원은 지난 9월 크레이지 슬롯에 대해 "청산 가치가 존속 가치보다 높다"며 회생절차 폐지를 결정했고, 결국 파산 선고로 이어졌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가장 큰 비판은 '제도 부재'다. 크레이지 슬롯가 보유한 정산금은 판매자 및 소비자 자금에 해당하지만, 현행법상 이를 예치금으로 보지 않는다. 정산금은 플랫폼 명의로 수취되기 때문에, 기업이 파산하면 일반 채권자 지위로 전락한다.
이는 예금자보호제도가 적용되는 금융기관과는 대조적이다. 은행은 파산해도 고객 예금이 일정 한도 내 보호되지만, 전자상거래 플랫폼은 이러한 제도적 보호망이 없다. 실제 피해자 단체인 '검은우산 비상대책위원회'는 회생절차 연장을 시도했지만, 법원이 요구한 항고 보증금 30억원을 마련하지 못해 기각됐다.
이번 사태는 플랫폼 경제 구조 자체의 한계를 보여준다. 실물 없이 신뢰와 자금 흐름에 의존하는 플랫폼 구조는 위기 상황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산금에 대한 지급보증제 도입, 공적 예치제도 신설, 정보공시 의무 강화 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 회생 전문 변호사는 "정산금은 사실상 예치금에 가까운 성격인데도,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며 "전자상거래 플랫폼 특성에 맞는 새로운 감독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제도 개선 없인 '제2의 크레이지 슬롯' 막기 어려워
크레이지 슬롯의 몰락은 단지 하나의 플랫폼 기업의 실패가 아니다. 전자상거래 시장 전반에 존재하는 제도적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 경고 사례다. 판매자와 소비자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 기업 회생절차의 유연성, 플랫폼 리스크에 대한 감독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언제든 유사한 사태는 재발할 수 있다.
피해자는 돈을 돌려받지 못했고, 법은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플랫폼 경제가 더욱 확대되는 시대, 제도는 그에 걸맞게 진화해야 한다. 크레이지 슬롯 파산은 그 필요성을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줬다.